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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외 관심사/세계사

중세 결혼 지참금

by 레옹달 2021. 9.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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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혼을 하기 전 미리 계약서를 적었다고 한다. 사실상 모든 결혼이 계약 결혼(?)이었던 것(! - 물론 의미는 다르겠지만.)

 

신부 측에서 보내는 지참금(dowry) -> 아내, 남편 공동 사용

https://en.wikipedia.org/wiki/Dowry

신랑 측에서 주는 지참금(dower) -> 아내만 사용(남편은 금지됨)

https://en.wikipedia.org/wiki/Dower

 

신부 지참금 : 유럽

지참금은 근대 초기까지 유럽에서 널리 시행되었습니다. 민속학자들은 종종 민화 신데렐라 를 지참금 제공의 필요성을 포함할 수 있는 자원을 위한 계모와 의붓딸 간의 경쟁으로 해석합니다 . Gioachino Rossini 의 오페라 La Cenerentola 는 이 경제적 기반을 명백하게 합니다. Don Magnifico는 세 번째 지참금을 제공해야 하는 경우 불가능한 더 큰 성냥을 유치하기 위해 자신의 딸들의 지참금을 더 크게 만들고 싶어합니다.

미혼 여성  납치  강간  대한 일반적인 처벌 중 하나 는 납치범이나 강간범이 여성의 지참금을 제공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20세기 후반까지 이것은 때때로 화환 화폐 또는 약속  위반 이라고 불렸습니다.

 

가난한 여성들에게 지참금을 제공하는 것은 부유한 교구민들에게 자선의 한 형태로 여겨졌습니다. 크리스마스 스타킹의 관습은 성 니콜라스(St. Nicholas) 의 전설에서 유래합니다. 성 니콜라스 는 가난한 세 자매의 스타킹에 금 을 넣어 지참금을 마련했습니다. 포르투갈의  엘리자베스 와 성 마르틴 드 포레스 는 그러한 지참금을 제공한 것으로 특히 유명했으며, 지참금 제공에 전념하는 로마 자선단체인 성모 영보 대축일회는 교황 우르바노 7세 의 전 재산을 받았습니다 . 1425년, 피렌체 공화국은 피렌체 신부에게 지참금을 제공하기 위해 몬테 델레 도티(Monte delle doti) 라는 공적 기금을 만들었습니다 .

 

광대한 유산은 중세 유럽의 귀족과 왕실 신부의 지참금으로 표준이었습니다. 1661년 영국 왕 찰스 2세가 포르투갈의 공주인 브라간자의 캐서린과 결혼 했을 때 포르투갈 왕실은 인도와 모로코의 두 도시를 영국 왕실에 지참금으로 주었다 .

어떤 경우에는, 수녀는 접합 할 때 지참금을 가지고 필요했다 수도원을 . [54] 앙시앙 레짐 프랑스( Ancien Régime France) 와 같은 경우에는 일부 부모가 수녀원을 사용하여 덜 매력적인 딸을 배치하여 결혼 가능성이 더 높은 딸이 더 많은 지참금을 가질 수 있도록 했습니다. [55] 적절한 지참금을 제공할 수 없는 Ancien Régime 가족들도 수녀원을 딸들을 위한 장소로 사용했습니다. 예를 들어 Bentheim 카운티 에서는 아들이 없는 부모가 새 사위에게 토지 지참금을 줄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성을 이어가기 위해 신부의 성을 취한다는 조건으로 주어졌다.

 

신부 지참금 : 잉글랜드

영국에서는 지참금이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나 딸이 상속받을 권리와 여성이 자신의 이름으로 재산 및 기타 권리를 보유할 수 있는 권리는 대륙에서와는 다른 수단이 되었습니다. 살리 지족의 법률 여성을 요구, 영국에서 적용되지 않았다 상속권을 박탈하고 토지 소유권에서 권리를 박탈당한합니다. 독신 여성은 남성이 가졌던 많은 권리를 가졌습니다. 이 영국 여성 상속 및 대리인 권리의 가장 유명한 예는 아마도 남성 군주가 했던 모든 권리를 보유한 영국의 엘리자베스 1세일 것입니다 .

 

독신 여성은 남성과 동등한 재산을 소유할 권리가 있었지만 결혼과 기혼 여성은 12세기 노르만 정복 의 법률 변경으로 영향을 받았습니다 . Coverture 는 일부 관할 지역에서 관습법 에 도입되어 아내의 재산이 남편의 이름으로 유지되고 양육권과 통제권을 가질 것을 요구했습니다. Normans는 또한 신부에게 아침 선물을주는 새 남편의 이전 관습을 대체하여 영국에서 지참금을 도입했습니다. 처음에 남편은 공개적으로했다 [또는 수신?] 결혼 지참금을 결혼식에서 교회 문.

남편이 먼저 사망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결혼 당시 남편 토지의 3분의 1에 대한 과부 지참금이 있었습니다. 수입, 그리고 어떤 경우에는 토지의 관리가 그녀의 남은 생애 동안 그녀에게 할당되었습니다. 이 개념은 대헌장에 포함되어 있으며, 여성 상속의 인정과 살리크법의 부재 와 함께 여성, 특히 독신 여성은 남성과 동등한 많은 권리를 보유하고 있어 영국법과 근본적으로 다른 영국법을 명시하고 있다. 대륙, 특히 신성 로마 제국 의 법 .

 

13세기 법원 기록은 지참금에 대한 논쟁으로 가득 차 있었고 법은 점점 더 복잡해졌습니다. [57]

영국의 지참금 제도는 대부분의 고귀한 가족이 딸과 결혼하여 친척과 후원 관계를 확장하는 것을 허용했습니다. 결혼할 수 있는 딸들은 야심 찬 아버지들에게 귀중한 상품이었고 영국 귀족들은 적격한 딸들 중 소수를 수녀원에 보냈습니다. 

 

관습적 또는 합의된 지참금을 제공하지 않으면 결혼이 취소될 수 있습니다. William Shakespeare  King Lear 에서 그러한 사건을 이용했습니다 . Cordelia의 구혼자 중 하나는 Lear 왕이 그녀에게 지참금을 주지 않을 것이라는 소식을 듣고 그의 소송을 포기합니다. 에서 측정에 대한 측정 , 클라우디오와 줄리엣의 혼전 섹스는 약혼 후 결혼 지참금을 통해 논쟁 가족 '에 의해 초래되었다. Angelo가 Mariana와의 약혼을 포기한 동기는 바다에서의 지참금 상실이었습니다.

 

빅토리아 시대 영국 에서는 일부 상류층은 지참금을 딸의 유산에 대한 조기 지불로 간주했습니다 . 어떤 경우에는 지참금을 받지 못한 딸들이 부모가 사망했을 때 유산의 일부를 받을 자격이 있는 유일한 여성 상속인이었습니다. 부부가 자녀 없이 사망하면 여성의 지참금은 종종 가족에게 반환됩니다.

 

Coverture 는 영국에서 보편적으로 적용되지 않았으며 1800년대에 폐지되었습니다. 이것은 미혼 여성의 재산이 결혼 후 그녀에 의해 유지되거나 그 수입이 남편과 공동으로 관리되는 부부 재산이 되었기 때문에 지참금의 개념을 효과적으로 종식시켰습니다.

 

러시아

유럽의 일부 지역, 특히 동유럽에서는 토지 지참금이 일반적이었습니다.

 

신랑 지참금

Dower  법률에 의해 부여 되었지만 전통적으로 남편이나 그의 가족에 의해 아내가 과부  경우 그녀의 부양을 위해 아내 에게 부여한 조항 입니다. 그것은 결혼식 당시의 합의에 의해 또는 법에 규정된 대로 신부에게 ( 신탁 으로 증여됨 ) 정산 되었습니다.

 

dower 는 결혼 준비를 위해 미리 신부 가족에게 넘겨 주던 신부 가격 ( 고대 영어 weotuma ) 의 게르만 관습에서 성장 했지만 중세 초기에는 대신 신부에게 직접 주어졌습니다. 그러나 대중적인 말투에서 이 용어는 결혼식뿐만 아니라 언제든지 남편이 아내에게 정하는 재산에 대한 종신 이익  사용될 수 있습니다.

 

Dower는 신랑이 신부에게 제공하는 선물로, 관례적으로 결혼식 후 아침에 신랑이 약혼자에게 약혼 기간이나 결혼식 중 또는 그 이후에, 심지어 유언장에서와 같이 늦게라도 신부에게 주는 선물입니다. , 과부의 부양을 위해 특별히 의도된 경우 dowers로 이해됩니다.

 

Dower는 초기 중세 독일 문화에서 처음 사용된 결혼을 위한 재산 마련이었고 가톨릭 교회는 이 추가 혜택으로 아내의 안전을 향상시키기 위해 다른 나라로 입양을 추진했습니다 . dower의 관행은 스웨덴, 독일, 노르망디 및 Langobardian 왕국의 계승 국가와 같은 게르만 스칸디나비아 문화의 영향을받은 유럽 지역에서 널리 퍼졌습니다 .

 

(내용 추가하기)

 

왕족들의 결혼 성사 과정

http://www.ggilbo.com/news/articleView.html?idxno=310066 

 

[양태자 박사의 5분 중세사] 왕족들의 결혼성사 과정 1 - 금강일보

13~15세기경에 왕족의 결혼은 어떻게 성사되었는지 몇몇 예를 통해서 그 과정을 보기로 하자. 먼저 프리드리히 2세(Friedrich:1194~1250)를 들어본다. 1215년 그는 자기 비서와 사신들을 브리에네(Brienne)

www.gg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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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15세기경에 왕족의 결혼은 어떻게 성사되었는지 몇몇 예를 통해서 그 과정을 보기로 하자.

먼저 프리드리히 2세(Friedrich:1194~1250)를 들어본다. 1215년 그는 자기 비서와 사신들을 브리에네(Brienne) 백작에게 보냈는데, 그의 딸 이사벨라(Isabella Brienne: 1212~1228)공주를 신부로 맞이하기 위해서다. 여기에 당도한 왕의 사신들은 왕의 구혼에 대한 이런저런 담화가 오고갔다.

드디어 양쪽에서 오케이 하는 지점에 이르면 결혼계약서 초안을 작성한다. 이 계약서 초안에는 혼수지참금은 얼마이며, 공주가 들고 갈 지참금, 신랑신부가 첫날밤을 보내고 나면, 신랑이 신부에게 줄 선물이 무엇 무엇이라는 것까지도 서로 합의 하에 상세하게 적었다. 중세에 이런 지참금 얘기와 ‘아침선물’에 대한 얘기도 많지만 여기선 이 정도로 그친다. 다만 하나 언급하자면, 신부가 많은 ‘아침선물’을 받으려면, 신부가 그만큼 지참금을 많이 들고 가면 된다. 신부가 가져온 만큼 ‘아침선물’을 신랑이 내어놓기 때문이다.

자 계약서까지 다 합의되었는데, 문제는 아직 신부를 못 보았다는 사실이 남아있다.

보다시피 이 시대에는 왕이 직접 나서는 것도 아니고, 왕이 가장 신임하는 사신들을 대신으로 신부될 이 집으로 보낸다. 일단 이 사신들이 신부 측과의 얘기도 나누고, 구체적인 지참금 등등이 다 결정되면, 그 다음은 결혼계약서초안을 쓴다는 것을 위에서 보았다. 이 절차들이 다 끝나면, 그제서야 신부를 보게 되는 기회가 제공된다고 브리기트하만이 밝혔다. 암튼 이런 혼사에 선택된 사신들은 왕의 특별한 총애와 믿음을 지닌 자들임에 틀림이 없다.

사신들이 타진에 나섰다 혹 신부가 등이 굽은 건 아닌지는 물론이고, 외모가 어떠한지까지를 은근슬쩍 염탐하고 나선, 위의 결과를 프리드리히 2세에게 모집된 정보를 미리 보냈다. 왕이 이런 신부를 아내로 받아들이길 찬성하는지? 여기에는 이사벨라(Isabella Brienne: 1212-1228) 신부의 외모는 물론 그녀에 관한 이모저모의 상세한 정보까지 들어있다.

이것을 본 왕은 예스인지 노인지를 다시 사신들에게 알렸던 거다. 이런 방법이 통과되어 드디어 30세의 프리드리히 2세는 13살의 신부를 맞이했다. 아무튼 당시 대개의 왕족들은 이런 방법을 통해서 신부를 택했는데, 프리드리히 2세는 13명의 여인을 거느렸고, 30명의 자녀를 두었다고!

 

+) 영어 자료+구글 번역=최고... 한글 자료는 너무 없다..

 

*출처

위키백과, 기사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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